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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개 이승현 나이 아내 이혼 파산 자살 재기 


인생 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하는 고교 얄개 시리즈의 이승현 배우는 1961년생입니다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데이트' 고교 얄개 명대사를 내뱉던 이승현씨는 당시 고교생들에게 강주희씨와 함께 인기폭발이었습니다. 1977년에 고교생들이 떡볶이, 쫄면 값 아껴서 430원의 영화비를 지불하고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길이 막히고 긴줄을 끝도 없이 섰던 최고의 인싸였습니다 


얄개 시리즈는 1977년 국도극장에서 처음 개봉한 고교얄개는 무려 26만명을 동원하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1천만명 관객이나 마찬가지이고 이승현씨가 받은 금액은 2~300만원으로 집 한채 가격이었다고 합니다. 



얄궂은 개구쟁이라는 뜻의 고교 얄개 시리즈 영화는 무명이었던 정윤희씨의 데뷔작이었으며 가장 완벽한 미모라는 찬사를 받으며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의 주인공이 되도록 포문을 열어준 영화입니다 


당시 최고 인기 배우였던 유지인같은 탑배우도 500만원 받던 시절이었으니 이승현씨가 고등학생 신분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6살 때 처음 연기를 시작한 이승현씨는 육체의 길이라는 조긍하 감독의 명작에 아역배우로 출연한 것이 시작입니다. 그 당시 이승현씨 어머니의 친국분이 충무로에 숙박업소를 운영했는데 이승현씨를 보고 마음에 들었던 조긍하 감독이 어머니께 출연제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조흔파 작가가 쓴 얄개전이 원작인 고교 얄개 시리즈는 이승현씨가 20편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1970년대 여주인공 강주희씨와 큰 인기를 끌었던 이승현씨는 무려 4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이승현씨는 고교 얄개를 찍기 전까지는 연기자의 길을 평생 걸으리라고는 생각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교 얄개와 고교 거꾸리와 장다리군, 고교 유량아 등등 얄개시리즈를 찍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길이 연기자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카메라만 돌아가면 완전히 몰입하여 한마디로 미친연기력을 선보이던 이승현씨는 한국 영화계의 침체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배우였고 하이틴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영화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박정희 대통령 군사정권 시절이라 검열이 무척 많았고 이승현씨가 하이틴스타로서 인기가 폭발적이라 알게 모르게 압박도 많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승현씨의 부모님은 엘리트계층이었고 어머니는 지금의 청와대인 외자청장에서 사무관 생활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의 연기생활을 지지하였지만 나중에는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가는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고 합니다. 


얄개시리즈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성인으로 넘어가면서 기존 고착되어 있던 이미지를 벗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승현씨는 성인 배우가 되면서 이미지 변신을 꾀했지만 아역배우로서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어떤 영화에 출연해도 좋은 결과를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강주희씨도 마찬가지여서 몇번 시도하다가 결국 연기를 포기하고 결혼 후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승현씨의 어머니는 계속해서 배우로서만 살기보다 해외로 나가서 공부도 많이 하고 넓은 세상을 보기 원하셨고 해외 유학을 적극적으로 권하셨다고 하네요!



결국 이승현씨는 성인 배우로 이미지 변신도 쉽지 않은 영화계 현실과 더불어 오랜 연기생활로 지친 마음에 캐나다로 훌쩍 떠나게 됩니다. 3000달러와 가방 하나 들고 간 캐나다 생활은 그야말로 탑배우 이승현씨를 철들게 했는데요?! 


캐나다에서 유학원을 하던 삼촌의 지인을 믿고 떠났지만 얼마 안있어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캐나다 땅에 그야말로 홀로서기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토론토대학에서 계획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영화사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식당 사업실패로 더이상 금전지원도 불가능해 학업을 지속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 후 레스토랑 서빙, 청소, 막노동, 교포슈퍼에서 야채다듬기, 지렁이잡기 일등 닥치는대로 생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승현씨는 7년동안 캐나다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지만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주변에서 한국에서 다 알아주는 탑스타였던 사람이 여기서 뭐하는 것이냐? 돌아가라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배우일이 잘 안되서 외국으로 온건데 3년도 안되어 돌아간다고 잘될거라는 생각은 안들었답니다. 


캐나다 지렁이 잡이


화장품 립스틱의 원료로 쓰이는 지렁이는 밤새 잡아서 깡통에 넣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그래 뵈도 정규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승현씨는 이시기를 회상하며 덕분에 어딜 갖다놔도 무섭지 않을 정도의 담대함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캐나다에서 계속 겉도는 듯한 인생을 살던 이승현씨를 보고 어머니는 더 있다가는 폐인될 것 같다며 필리핀으로 오게 합니다. 


어머니 또한 이승현씨 아버지와 이혼하고 혼자 요식업을 하시다가 잘 안되었고 얼마 남지 않은 돈 가지고 필리핀으로 떠나게 됩니다. 후에 이승현씨가 어머니 돌아가시고 한참 후에 어렵게 연락이 끊긴 아버지를 만나는데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고 하네요~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살고 계시는 어머니 품으로 가서 2년반 동안 머물며 신학 공부도 하고 선교와 봉사 활동을 하며 지내던 이승현은 유학온 한국인 여성을 만나 한국으로 돌아가 결혼식을 치르고 다시 어머니를 따라 영국으로 가서 살게 됩니다.. 




영국으로 가서는 비싼 물가와 적응의 어려움으로 1년만에 한국으로 귀국을 하게 되는데 이승현씨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해외로 나가 배우로서의 경력이 단절되고 고생을 많이 한 것에 큰 후회를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승현씨가 아내를 만난 것도 외국이었고, 고생은 했다고 하지만 젊은 시절이 아니며 절대로 할 수 없는 아르바이트들을 얼굴 모르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한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젊음의 시기는 누구도 되돌아갈 수 없는 한번 뿐인 시기입니다 

pc방 알바, 편의점, 커피숍, 서빙 아르바이트 등은 주로 젊은 사람들만 할 수 있고 콜센터도 나이 들면 목소리도 변하고 관리자들도 다 나이가 어려 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지쳐서 번아웃된 곳에서는 어떤 열매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경험을 했다는 이승현씨는 노숙자생활까지 하며 버틴 캐나다에서의 삶이 무척 감사하고 무슨 일도 두려움없이 할 수 있다는 마인드를 얻었습니다.   


한국에 온 후에는 대전에서 얄개 만두 가게를 열고 장도 보고 직접 만들어 배달도 하였고, 공중전화기와 감식초 장사, 옥방석까지 팔아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은연중에 배우생활을 다시 하고 싶다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충무로에 가서 다시 일할 기회를 잡고 싶었지만 그 당시 아는 사람들은 다 나이가 들고 돌아가셔서 제대로 된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조폭 영화에서 중간 보스 역할로 비중있게 나왔지만 흥행에는 실패하여 다시 재기하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승현씨의 아내가 남편이 배우생활을 다시 하는 것을 싫어하셨다고 합니다. 일이 불규칙적인데다가 일하는 시간도 정해진 게 없어 밤새 일하고 회식도 하다보면 집에도 못들어가니 아내로서는 당연히 반길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 2년 후 후배가 차린 대한영화사에 일을 맡아주러 갑니다. 후배와 함께 야심차게 차린 영화사였지만 중간에 투자자들이 돈을 끌어오지 못해 1, 2번만 영화 촬영하고나서 제작비 부족으로 그만 감독의 자리에서 하차하게 됩니다. 


이 때 영화판에서 재기하는 길이 계속해서 좌절되는 것에 낙심해버린 이승현씨는 후배와 함께 자살을 결심하고 면도날을 사서 두조각으로 나누었지만 막판에  후배가 말리는 바람에 다행히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당대의 탑스타였던 이승현씨가 이렇게 재기가 힘든 고통의 시기가 있었네요... 모두가 날 섭외하려 하고 최고의 개런티를 받던 탑스타에서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가서 올라오지 못하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하지만 이 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인간극장에 출연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팬들 위줄로 얄개살리기 프로젝트인 이승현 살리기 운동본부가 가동되었습니다. 



이승현씨의 과거 팬이었던 분들이 뭉쳐 5천명의 팬클럽을 결성하였고 이승현씨가 출연하는 뮤지컬에 그렇게 객석을 꽉꽉 메우고 힘을 주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 시절 군사정권 시절에 학창 시절 행복하고 달달한 추억을 선사해준 왕녀의 스타에게 팬들이 수십년만에 다시 힘을 주네요! 


이승현씨는 100여편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였지만 인기도 성공도 다 사라지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고 합니다. 

인생이고 영화고 언제까지나 주인공만 할 수 없다... 어떤 작품에도 조미료같이 맛깔나는 배우가 되라며 인생의 큰 조언을 던져주었습니다 


이승현 가수? 


이승현씨는 정규 앨범을 내지는 않았지만 다 잘될거야라는 디지털 음원을 내며 7080콘서트에도 출연하였습니다. 

벅스뮤직 2위까지 올라갈 정도로 인기도 얻었습니다. 


노래를 하면서 뮤지컬도 동시에 생각하게 되었고 김정훈씨와 함께 돌아온 고교얄개라는 작품을 관객들에게 선보이게 된 것입니다. 



나이든 지금의 이승현 얄개와 젊은 배우가 맡은 얄개와 대화하며 새로운 감동을 선사합니다. 


또한 계속해서 영화사에서도 연락이 와서 작품 출연도 계속 하신다고 하니 그렇게 원하던 컴백이 결국 이렇게 이루어지게 되었네요! 이승현씨는 첫 아내와는 이혼하였지만 최근 6개월밖에 안된 신혼의 사랑을 만끽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승현씨는 아들을 보고 살기는 힘든 상태이신가봐요~ 아무래도 이혼할 당시 경제적인 문제 등이 컸고 감정이 많이 상해 아들을 보고 살 형편이 안되었나 봅니다. 아내분도 재혼하셨다면 더더욱 친아버지와 연락하기 껄끄러울 수 있습니다. 이승현씨가 혼자 먹고 사는 것도 힘들어 연락을 주저했을 수도 있구요.. 


이승현씨도 자신의 아버지와 똑같이 이혼 후 오랫동안 못보고 살았는데 아들과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 너무 안타깝네요.. 지금은 설명자씨라는 분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였고 조치원 전집을 하시는 명자씨 일도 적극적으로 도우며 행복한 신혼생활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승현씨가 한국에서 계속 잘 나가고 성인영화에서 계속 주연으로 불러주었다면 과연 정말 잘되었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건물 사서 올리고 좋은 시절 보낼 수도 있었고 이승현씨의 인생사를 보며 그렇게 쉽게 쉽게 말하는 댓글들이 많습니다. 그냥 집 10채 살돈으로 부동산들에 투자해서 앉아서 월세 따박따박 받으며 돈 벌면 되는데 잘못된 투자해서 저렇게 말아먹었다! 이런 식으로요~ 


인생의 모든 가치가 돈으로 되어 있다면 뭐,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작은 산 하나도 올라가다보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나오고 계곡도 있으며 작은 시냇물도 나오고 폭포도 나오다가 나중에 아무것도 없는 광야같은 길도 나오는 것입니다. 중간에 힘들다고 다시 내려올 수도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시간이야말로 모두에게 주어진 공평한 자원이죠~




가족들과 오랜만에 명산을 찾았지만 물이 말라 계곡에서 물놀이도 할 수 없고 길이 막혀 다시 되돌아 와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중간중간에 휴지, 물병들은 왜 그렇게 많이 버리는 건지 봉다리에 주워 내려오다보면 허리가 구부러질 지경입니다. 그렇다고 내버려두면 환경이 오염된 채 오랫동안 산을 황폐하게 만들겠죠... 


하지만 가족과 때로는 떨어져 싸우기도 하고 알콩달콩해지기도 하면서 산을 올라가고 내려오다 보면 어느새 정상도 나오고 하산 후 기가막히게 맛있는 파전과 동동주, 바리스타가 타준 맛난 커피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탑스타였던 이승현씨에게도 인생은 원하던 대로만 되지 않았지만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과 벼랑끝까지 내려도 가봤지만 포기하지 노력하며 걷다보면 고생한만 내가 원한 것보다 훨씬 더 맛있고 좋은 것들이 어느순간 내곁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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