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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미 나이 결혼 남편 부동산 재산 제주도집

 

가수 방미는 원래 코미디언으로 데뷔했습니다.

 

방미 본명은 박미애. 나이는 1960년 4월생으로 올해 59세. 방미 학력은 송곡여자고등학교 졸업후 미국 브룩대학교 뮤지컬연기연출학과를 나왔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인 1978년 mbc 공채2기 코미디언으로 데뷔해서 잠시 활동하다가, 신인시절에 발표했던 '날 보러와요'라는 노래가 크게 히트치면서 가수로 전향합니다. 이후 '주저하지 말아요', '계절이 두번 바뀌면' , '욕심많은 여자'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가수로써 큰 사랑을 받게되고,

1984년 동경음악제 은상 이듬해 KBS 방송가요대상 여자부문을 수상했습니다.

 

방미의 어린시절은 불우하였는데요.

방미 아버지는 화투, 도박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가 남대문에서 옷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고 합니다.

 

보낸 방미가 연예인이 되어 돈을 많이 벌겠다는 꿈을 갖게 된 것은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보냈고,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였다고 합니다.

 


방미는 어린시절에 대해,

어머니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여린 여자였고, 아버지는 평소 엄했으며, 이북 출신으로 혼자 남한으로 내려와 괴롭고 외로운 심정을 노름으로 풀었다고 합니다. 방미가 10살무렵때부터 노름에 빠진 아버지는 가정을 등한시했고, 수도없이 단칸방을 전전하며 이사를 해오면서 돈이 없어 부족한것 천지였고, 늘 불안에 떨어야하는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심지어 아버지는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방미는 어린시절 그러한 가난한 삶에 대해  염증을 느끼다가 19살쯤 되던해에 방송국일을 하게 되면서 집에서 어머니를 데리고 나오는 반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또한 부모님을 이혼시킨 것 또한 방미 본인이었다고 하네요.

이렇게해서 방미는 소녀가장이 되어 어머니를 부양하게 됩니다.

 

방미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방미 - "돌아가신 아버님이 내게 남겨주신 교훈은, 돈이 없으면 사고싶거나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고, 살 곳을 찾아 이사를 자주 다녀야 하고, 가족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 가족의 가장이 노름에 빠지고 폭력을 휘두르면 함께사는 가족들이 무척 힘들어지게 되겠죠.

방미는 어릴적부터 가난한 생활과 불성실한 가장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돈을 벌어야겠다는 확고한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0억 자산가 방미 재산


방미는 데뷔후 코미디언 시절에 발표했던 노래 '날 보러와요'가 크게 히트를 치면서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고 하는데요. 이때 받은 출연료 700만원이 그녀를 바산가로 만드는 밑거름이 됩니다.

 

영화 출연료 7백만원으로 대전 유성온천 근처에 땅을 샀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산 땅이 12년후 20배가 넘는 1억5천만원에 팔렸다고 하는데, 이로인해 방미는 부동산 투자의 묘미를 알게됐다고..

 

이후 강남 아파트를 구매해서 3년만에 5배 넘는 금액을 받고 팔았다고 합니다. 당시 1980~90년대 우리나라는 부동산 투기가 한창이던 시절이어서 매우 활성화되었었죠.

 

방미는,

"주위 동료들이 연예인 생활하면서 번 돈을 명품 외제차를 타면서 해외로 나가 쇼핑으로 펑펑쓰며 으시대고 놀때, 난 "꼭 부자가 될 거다'는 마음가짐으로 젊은 활기가 넘치던 자신을 추스리며 미래를 위한 투자를 했어요.

난 이미 20대 후반에 집을 4채나 갖고 있었고, 30대 중반이었을땐 당장 일을 안해도 살 수 있을 정도로 한국에 건물과 집. 미국에 집과 사업체를 갖고 상당한 부를 축적하게 됐는데, 노력의 댓가였어요"

 


이렇듯 방미는 부동산 투자뿐 아니라 환차익까지 잘 이용하는데요.

1993년 미국 유학을 갔는데, 98년초에 유학자금이었던 현금 14만불와 벤츠승용차, 살림살이들을 팔아 한국으로 달러 송금을 해서 1달만에 2배 넘는 환차익을 낼 수 있었고, 이를 다시 뉴욕 콘도 분양 투자금으로 활용했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엔 IMF 외환위기 상황이었고 환율이 2배 이상 폭등하던 시기였죠. 이를 방미는 잘 활용한 사례겠네요.

 

또한 방미는 미국에서도 부동산 투자에 성공을 했는데요.

2000년 뉴욕 업타운에 30만달러 집을 구입해서 2004년 부동산 시세가 최고치에 올랐을때 매각해 수익을 남겼고, 2006년에도 맨하튼 리버사이드 콘도를 구매후 일년만에 2배의 가격으로 되팔아서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렇게해서 방미는 200억대의 재산을 소유한 자산가가 됩니다.

방미가 재산을 모으는 과정에는 이재에 밝은 타고난 자질도 있었지만, 조력자로서 방미와 함께 좋은시절과 힘든 시절을 함께한 남자친구의 역할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년 넘게 남자친구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으니, 방미는 남자친구를 '파트너'라고 말하고 있지만 결혼식만 안올렸을 뿐 거의 남편이라고 봐야 할 거 같네요.

 

 

방미 결혼과 남자친구

 

가수이자 사업가 방미는 아직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함께한 남자친구, 애인이 있습니다.

 

방미가 남자친구를 처음 만났을때 남친은 대학교1학년이었다고 합니다. 방미가 한참 잘 나가던 전성기때 대학교를 다니던 남자친구는 새벽 두세시까지 운전과 궂은일들을 다해주며 매니저 역할을 저청했다고 합니다. 또한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새벽까지 방미를 도와준 후 두시간 정도자고 새벽에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가면서 졸업을 했다고 하네요. 그 시절을 방미는 절대 잊지 못한다고...

남자친구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음악이었지만, 남친 부모님이 원하던 건축공학과에 진학후 졸업 이후에도 진로 고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가 1988~89년 이었고 방미는 이십대 후반, 남친은 갓 스무살때였습니다. 방미 남자친구는 7~9살 연하로 추정됩니다. (후에 방미 남자친구는 국내 대학 전자공학과를 졸업후, 미국 UCLA에서 음악프로듀싱을 전공하게 됩니다.)

방미가 전성기였던 당시는 연상연하 커플에 대한 편견이 심했었고, 연예인에게 있어서 스캔들은 곧 연예인 수명과 직결되는 시기여서, 주위 모르게 숨죽여가며 힘들게 연애를 했다고 하네요.

 

방미는 남자친구에 대해,

"나보다 어리지만 똑똑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다. 언제나 한결같고 정직하며 부지런하고 모든일을 깔끔 정확하게 해내는 엘리트여서 후에 내가 자산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과 조언을 해줬다. 난 그를 파트너라고 부른다'


남자친구가 자신을 만나면서 인생의 경로를 바꾸게 됐다고 하는데, 당시 전성기를 보내던 방미는 한강변 55평 신동아아파트에 살았고, 방배동 삼호아파트를 한채 더 가지고 있었는데 1988년~ 1993년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던 시기에 너무 바빠서 시간을 도저히 못내던 방미를 도와 부동산 거래를 대신해준 것이 남자친구였다고 합니다. 당시는 부동산 거래를 정말 많이 하던 시기.

대학을 다니던 남자친구가 부동산 계약금과 잔금을 치루며 큰돈을 만지게되면서 비록 자기돈은 아니었지만 당시 배웠던 것들이 많았을거라고..

 


방미는 남자친구와 형식적인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오랜시간 남친을 지켜보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실히 알게 된 후, 남자친구를 위해 나 자신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남친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됐는데 방미는 연예계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함께 건너가게됩니다. 방미는 1989년에 잠시 연예계 은퇴를 했다가 1993년 정식 은퇴를 합니다.

사실 당시 가요계는 10대 댄스 가수들이 주름잡던 시기여서 기존 가수들의 설 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방미 남자친구는 명문 UCLA에서 공부를 하고, 방미는 이모와 함께 브로드웨이 28번가에 쥬얼리 전문점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계기가 된 것중에는 방미가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는 일도 한 몫 했는데요. 지인이 급하게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처음엔 5천만원을 빌려줬는데 점점 더 많은 액수의 돈을 빌려주게됐고 결국 지인의 사업체는 부도가 나면서 7억원 가량을 떼이게 됐다고 합니다. 이때 충격으로 3개월동안 밥도 못먹고 병원신세를 질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하는데요. 돈 떼인것도 그렇지만 믿었떤 지인에게 배신당한 느낌에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고 세상 살기가 싫어지더라고.. 심한 우울증을 겪다가 한국에서 도저히 살맛이 안나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이후 방미는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게 되는데요. 남자친구는 2년반을 미국에 더 체류하며 UCLA를 졸업하고 나서야 돌아오게 됩니다. 남자친구가 친구얘기를 듣고 주식에 투자하여 큰 손실을 보는 일이 있었다는데, 방미가 나서서 원금을 회수할 수 있게 해줬다고 하네요.

이처럼 남자친구와 어려울때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함께해나가는 좋은 파트너 관계가 좋다고 하는 방미는, 이런시절부터 봐온 남자친구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으로 투자를 했고, 예상대로 남자친구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해 큰 돈을 벌며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방미 - "친구는 친구고 돈은 돈이다. 난 지금도 똑같고 친구도 그런 날 잘알고 있다"

 

이처럼 방미는 남자친구와 인생의 동반자 겸 좋은 사업 파트너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고, 누 사람간에 자녀도 없지만, 28년간 함께 해온 남자친구가 실직적인 방미 남편 처럼 보여집니다.

 


방미 - "제가 40살 즈음에 결혼이 너무 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요. 당시 남자친구는 미국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시기여서 너무 바빴고, 저 또한 그 시기가 지나고나니 굳이 결혼을 해야하나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나 남친이나 동에번쩍 서에번쩍하며 살아와서 평범한 결혼생활이 맞지 않는거 같기도 하구요"

"남자친구과 현재 멀리 떨어져있긴 하지만 서로 성격이 너무 잘 맞아요. 설레는 시기는 지나갔고, 지금은 목소리만 들어도 편하고 힘이되요. 연하지만 어른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어떤때는 모성애를 자극하기도 해서 매 번 새로우니까 오랜시간 만날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방미 -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전 꿈이 없어요. 쥬얼리 체인점을 오픈하는 건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라서 하는거에요. 20대때는 연예인으로 출세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게 꿈이었고, 30대때는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게 꿈이었고, 40대때는 전 세계를 돌며 비즈니스를 하고 싶었죠. 가치관이 변하는 거 같아요. 한데 지금은 여행을 다니고 사람을 만나고 간혹 한국에 들어와서 재테크 관련 조언을 들려주면서 제 경험을 공유하고 투자 전문가로 강의도 할 생각이에요. 돈이 많으면 인생이 돈에 메이게 되는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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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방미에게는 남부럽지 않은 재산도 있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미이지만, 인생에서 성공의 척도를 남편(혹은 아내)과 자녀에 두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꿈인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방미 같은 삶이 행복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방미 제주도 집


앞만 보며 달려온 탓에 그녀의 인생은 가수로서도 사업가로서도 성공! 하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찾아온 건 인생의 허무함과 건강의 적신호였다고 하는데요. 잠시 쉬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 그녀가 선택한 것은 바로 요가와 여행. 모처럼 삶의 휴식을 맛보며 살고 

있다는데...



그러나 휴식만 하는 건 영 체질에 맞지 않는 그녀. 몇 년 전, 제주도에 세컨드 하우스를 마련하며 새로운 노후 계획에 돌입했습니다. 바로 자신처럼 평생 앞만 보며 달려오느라 몸도 마음도 망가진 현대인들을 위해 힐링의 공간을 마련하기로 한 것. 일찍이 요가 자격증을 취득한 그녀는 무료로 요가 수업을 제공할 요가원을 지을 계획이라고...


방미 - “오래전부터 하는 제 생각은 돈으로 도네이션 하는 것보다 제가 설치하고 만들고, 가르침을 주는 도네이션...힐링을 할 기회를 주고 저도 힐링을 받고 그렇게 노후를 살아가는 인생의 꿈을 그리고 있어요.”



가수 방미가 현재 살고 있는 제주도 집은, 방송에서 보여진 전경등으로 봤을때 제주도 서귀포시 색달동에 위치한 '제주 중문 씨사이드 아덴' 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아파트가 아니고 콘도, 리조트입니다.


지금까지 일궈놓은 것들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고 싶다는 방미. 

자신의 성공 비결이 담긴 책을 출간하고, 1인 방송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 중인 그녀는 요가, 부동산, 건강 등 육십 평생 그녀가 쌓아온 모든 인생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다 효과적이고 뜻깊은 방식으로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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